[김은아의 도시스카프] 노인은 늙지 않는다

노년의 아침, 선진국과 한국 다르다
사라진 사람들, 그들은 어디 있는가
삶을 설계하는 자유는 모두의 권리
누구나 누릴 수 있는 도시 설계해야

아침 7시, 캐나다의 팀홀튼 카페. 창밖은 여전히 새벽의 차가운 공기가 남아 있지만, 카페 안은 따뜻하고 분주하다. 하얀 머리의 할머니가 도넛을 반으로 잘라 건넨다. “You should be careful of sugar(당 조심해야 합니다)….”

할아버지는 머쓱한 듯 웃으며 도넛을 받아든다. 옆 테이블에서는 다른 노인들이 신문을 펼쳐 들고 정치 이야기에 열을 올린다. 커피 한 잔 값으로 시작되는 이 아침은 누군가에겐 건너뛸 수 있는 사소함이지만, 그들에게는 온전한 하루의 시작이다. 이곳에서 노인들은 누구의 돌봄도 받지 않는다. 그저 자유로운 한 명의 사람으로서 존재한다.

한국의 아침은 다르다. 도시의 카페는 출근길 직장인들로 붐비고, 노인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65세 이상 인구가 천만 명을 넘어섰지만, 그들의 삶은 도시 한가운데서 사라져버렸다. 공원의 운동기구 옆에서 묵묵히 몸을 푸는 노인, 병원의 대기실에서 하염없이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리는 어르신들, 요양원 창가에 앉아 멍하니 바깥을 내다보는 모습이 떠오를 뿐이다.

그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왜 그들은 도시에 스며들지 못하고, 삶의 공간에서 밀려난 채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어버렸을까.

한국 사회는 경제적 생산성을 인간의 가치로 재단한다. 직장에서 퇴직하고, 더 이상 돈을 벌 수 없게 되는 순간, 점점 ‘투명인간’화된다. 쓸모를 다한 물건처럼, 세상의 중심에서 멀어져 점점 구석으로 밀려난다. 가정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가족을 위해 헌신했던 부모의 존재는, 생산적 역할이 끝나는 순간 짐보따리로 변하기 시작한다.

얼마 전 식당에서 우연히 들은 대화가 귓가를 떠나지 않는다. “옆집 영감이 어제 욕실에서 넘어졌다는데, 글쎄 오늘 죽었다지 뭐야. 우리 영감이 계속 눈물을 훔치네…. 사흘은 살아야지. 그래야 못다 한 말이라도 하고 가야지….” “사흘씩이나 뭐하게. 하루면 충분해. 재산 정리만 하면 되지.”

어르신들은 웃으며 말씀은 하셨지만, 설마 진심일까 할 만큼 머릿속이 잠시 복잡해졌다. 누군가의 삶이 정리해야 할 ‘단 몇 시간’으로 치부된다면 참 서글픈 일이다.

‘돌봄’과 ‘치유’를 목적으로 시작된 정책들은 대부분 요양 시설에 집중되어 있다. 노인들은 철저히 통제된 프로그램에 따라 움직인다. 지정된 자리에서 단순한 신체 활동을 하고, 색칠 공부를 반복하며 시간을 때운다. 누군가는 자유롭게 움직일 힘이 있어도 요양원에 들어서는 순간 ‘보호’의 틀 속에 갇혀버린다.

어쩌면 우리는 노인에게서 한 사람이 온전한 존재로서 누릴 수 있는 삶을 빼앗은 것이 아닐까. 돌봄과 치유는 노인들이 즐겁게 살아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결과’여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출발점으로 삼아 노인을 ‘죽음의 종착역’에 안착하게 한다.

오랜 시간 인간을 위해 헌신한 안내견조차도 은퇴하면 새로운 가정으로 입양을 보낸다. 그곳에서 여유롭게 먹고 마시고 즐기며, 남은 생을 편안히 보낸다. 안내견의 은퇴는 새로운 시작이자 존중받는 휴식이다.

하지만 우리는 노인에게 이런 휴식을 허락하지 않는다. 평생 가족과 사회를 위해 일해온 노인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요양’이라는 이름의 고립이다. 안내견에게 주어지는 마지막의 따뜻함과 존중은 왜 노인에게는 허락되지 않을까?

노인 자체는 돌봄이 필요한 결핍된 존재가 아니다. 그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자유롭게 삶을 설계하고, 누릴 수 있는 나이가 좀 더 많은 한 사람일 뿐이다.

노인의 삶을 온전히 존중하는 도시를 만드는 일은 먼 이야기가 아니다. 도시를 다시 설계하는 일은 결국 노인이 사회의 중심으로 돌아올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는 것이다.

영국의 하이드파크에는 노인을 위한 놀이터가 있다. 노인들은 이곳에서 몸을 움직이고 친구를 만나며 시간을 보낸다. 움직임과 만남은 그들의 일상에 활력을 더한다. 미국 시카고의 ‘모어 댄 어 카페’에선 노인들이 함께 춤을 배우고 책을 읽으며 저렴한 가격에 양질의 식사도 할 수 있다. 노인들이 사회와 연결될 수 있는 공간이 도시의 한가운데 마련되어 있다. 노인이 일상의 중심을 누리며 도시와 연결되도록 한다. 삶을 삶으로 잇는다.

그러한 여건이 필요하다. 기존의 시설을 노인들이 활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시설에 집중되는 예산 지원 대신 노인들에게 바우처를 제공해 카페, 극장, 스포츠센터 등 일상의 공간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노인을 시설에 가두기보다 일상에서 자유롭게 살아갈 권리를 되찾아 주어야 한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속 산티아고는 84일간 고기를 잡지 못했지만, 다시 바다로 나간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파괴될 수 있을지언정 패배하지 않는다.”

육체는 늙어갈지언정 의지와 열정은 여전히 살아있다. 노인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더 이상 ‘보호받아야 할 존재’가 아니다. 삶의 경험과 의지를 가진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모두가 노인의 삶을 존중하고 그들에게 다시 선택의 권리를 돌려줄 때, 도시의 풍경도 삶의 온도도 달라질 것이다.

도심의 카페의 풍경을 상상해보자. 아침 7시,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커피를 나누며 도넛을 자른다. 스포츠센터에서는 노인들이 함께 운동을 하고, 한 카페에서는 노인들이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에 열을 올린다. 주변에는 청년들이 일하고 담소를 나눈다. 그 모습은 특별하지도, 낯설지도 않다.

노인은 늙지 않는다. 다만 우리의 시선이 그들을 늙은 ‘No人’으로 만들었을 뿐이다. 이제 그 시선을 바꿀 때다. 그 변화는 ‘그들 노인’이 아니라 ‘미래의 노인, 나’를 위한 일이다.

출처: 디지털타임즈(오피니언/칼럼)
입력 : 2024-12-18 08:23 수정: 2024-12-18 18:41 22면

조회수: 0

댓글 달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

위로 스크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