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장 한구석에서 우연히 마주한 아이의 그림이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빽빽이 쌓인 네모난 상자들 뒤로 사회·수학·과학 영재들의 글씨가 경쟁하듯 촘촘히 쓰여 있었다. 그림 옆에는 또 다른 아이의 감상평이 덧붙여 있었다. “도시를 보는 게 신기한데, 너무 징그러워요.”
우리가 도시를 성취와 기회의 공간, 경제 성장의 동력으로 당연시해 오는 동안, 한 아이의 순수한 눈에는 거대한 콘크리트 괴물 같은 압박으로 보였던 것이다. 평상시 주변을 살필 여유가 없는 아이들이 도시의 전경을 본다는 것은 신기하지만, 동시에 징그럽다는 것은 아이들이 본능적으로 느끼는 감정을 보여준다. 이 한 문장의 무게가 오래도록 마음을 짓눌렀다.
아이들이 말하는 ‘징그러움’은 단순한 변덕이 아닐 것이다. 어른들이 무뎌져서 감지하지 못하는 것을 아이들은 온몸으로 받아낸다. 고층 건물 숲, 시끄러운 교통 소음, 번쩍이는 간판의 홍수. 이 모든 것들이 아이들의 섬세한 감각을 자극한다.
오늘날 도시의 모습은 서로 비슷하다. 특히 서울 같은 글로벌 도시들은 더더욱 어디를 가나 비슷하다. 도로 위에 펼쳐진 똑같은 건물들, 끝없이 반복되는 간판, 숨 쉴 여백이 없는 거리. 밤이 되면 조명만 가득한 네모난 상자들이 어쩌면 아이가 표현한 ‘징그러움’과 닮아 있기도 한다.
비단 도시만이 아니라 건물이나 공간에 대한 첫 경험이 즐거움이 아닌 거부감으로 다가올 때, 그것은 아이들의 마음에 무의식적으로 각인되는 상처가 된다. 덴마크의 도시계획가 얀 겔은 “우리는 건물을 위한 도시를 만들고 있다. 사람을 위한 도시가 아니다”라고 일찍이 경고했다. 그의 지적처럼 현대 도시는 자동차와 건물의 효율성을 우선시하며, 정작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감각과 욕구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그 결과, 도시는 삶의 공간이 아닌, 견뎌내는 공간이 되어버렸다.
하늘을 제외한 동서남북 그리고 바닥까지 콘크리트로 둘러싸인 환경은 뇌의 인지 부하를 높여 성장기에 있는 아이들에게 더 큰 부담을 준다. 아이들이 느끼는 ‘징그러움’이라는 것도 그런 측면에서는 과학적으로 근거 있는 반응인 셈이다.
영화 ‘매트릭스’를 떠올려 본다. 코드가 만들어 낸 가상현실 속에서 사람들은 시스템에 길들여지고 익숙해진 나머지 가상공간을 진짜 공간으로 느끼고, 심지어 그 삶을 그리워하기도 한다. 도시의 건축물도 자유시장 경제가 찍어낸 시스템과 흡사하다. 지금까지 땅바닥에 발을 붙이고 살아왔던 이 도시 공간이 진짜일까. 그 공간의 삶은 진짜일까 허상일까. 삶이 존재하기는 한 것일까. 플라톤의 동굴 벽에 비친 그림자처럼, 아이들은 이 풍경을 보며 본능적으로 의문을 던질 것이다. “이곳이 진짜 우리가 사는 곳인가요?”
어른들에게는 일상이 된 풍경이지만, 아이들에게는 여전히 낯설고 위압적이다. 이 감정을 우리는 더욱 주의 깊게 살필 필요가 있다. 오히려 이것이 우리가 놓친 도시의 민낯을 드러내는 신호일지 모른다.
문제는 어른들이 이 목소리를 간과하거나 듣지 못한다는 점이다. 매일 출퇴근길에 콘크리트 벽을 지나며, 답답함이 ‘당연한 것’으로 굳어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부터 도시의 획일성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을까.
우리의 도시는 ‘속도’라는 특수성을 갖고 있다. 불과 몇십 년 만에 농촌에서 초고밀도 도시 사회로 급변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척도를 고려할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도시학자 얀 겔이 “생명이 먼저이고, 그다음이 공간이며, 마지막이 건축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순서를 뒤집어 건축부터 앞세우고 말았다”라고 지적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세대를 거치며 아이들의 불편한 기억은 ‘도시란 원래 그런 것’이라는 체념으로 굳어진다. 개발업자들은 더 많은 상자를 쌓아 올리며 녹지와 여백을 잠식한다. 이른바 ‘적응의 함정’이다. 나쁜 환경에 익숙해져 그것을 정상이라고 착각하고, 더 나은 환경에 대한 상상력마저 잃게 된다. 도시는 본래 생명의 터전이어야 한다. 건축은 단순히 구조물을 세우는 일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과 감정을 온전히 품는 그릇이 되어야 한다.
북미나 유럽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어느 동네의 저녁 풍경을 떠올려 본다. 해가 저물 무렵이면, 아이들이 잔디밭으로 뛰어나오고, 부모들은 벤치에 앉아 담소를 나눈다. 나무 그늘 아래에서 개들이 뛰놀고, 흙길 위에서 아이들이 웃음을 터뜨린다. 별다른 놀이기구가 없어도 땅바닥에 그림을 그리면서라도 신나게 뛰어논다. 콘크리트의 각진 상자가 아닌, 생명이 살아 있는 공간에서 건축은 배경이 된다. 건축물이라는 동굴에 갇혀 건축물을 진정한 삶의 공간으로 인지할 것이다. 그리고, 그곳을 벗어나면 더 나은 삶의 공간과 경험, 그리고 감정이 있음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언제쯤 우리 아이들이 학원 대신 놀이터로, 아스팔트 대신 흙과 잔디를 일상에서 마음껏 즐길 수 있을까. 도시는 본래 사람들의 감정과 감각을 키우는 무대여야 한다. 아이들에게 ‘징그러움’이 아니라 ‘기대감’으로 다가오는 공간, 효율이 아니라 생명의 리듬을 따르는 건축, 그리고 인간의 속도에 맞춘 거리가 되어야 한다.
아이가 그린 징그러운 상자들이 우리에게 던지는 경고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런 곳에서 살고 싶지 않아요”라는 감정의 소리 말이다. 도시의 주인이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단순한 진리를 다시금 생각해봐야 한다. 웃음소리와 바람, 나무와 빛이야말로 도시의 진짜 주재료라는 것을. 그 위에서야 비로소 건축은 제자리를 찾는다.
아이들이 언젠가 도시를 향해 이렇게 말할 수 있기를 바란다. “도시를 보는 게 신기한데, 참 아름다워요.”
출처: 디지털타임즈(오피니언/칼럼)
입력 2025-09-17 17:34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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