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한다는 말 한번 제대로 하지 못했어도, 언제나 곁에 있음을
지극히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집안에서 성장했다. 아빠는 남존여비 사상을 지상최고의 철학으로 여기셨고, 아들 하나 딸 셋 중 막내로 성장한 나는 그런 아빠의 가르침에나 태도에 별다른 저항은 없었다. ‘여자는 남자를 위해 살아야 하고, 여자의 모든 존재 이유는 가정에 있다’는 것이 대략 아버지의 요지셨다. 스며들듯 어릴 때부터 보고 자란 탓인지 불편하지도 않았고, 심지어 당연하기도 했다. 아빠는 날 늘 여자로만 키우셨을 뿐 한 사람으로 양육하지는 못하셨다. 어른이 되고서야 알았다. 내가 존엄한 한 인격체임을…
아빠, 미워할 수도 없는
여섯 살 터울이 나는, 남동생이 갖고 싶었던 오빠는 나를 남동생 삼아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온 동네 골목을 데리고 다니며 사내아이들이 하는 온갖 놀이에 끼워줬다. 구슬치기, 딱지치기, 말뚝박기, 보리밭에 불 지르기, 모닥불에 돌 굽기 등 어릴 적 나는 그야말로 섬머스마처럼 온 동네를 휘젓고 다녔다. 딱히 여자라는 인식도 없었다. 놀 때만큼은 말이다. 그렇게 밤이 깊도록 놀고 집에 돌아오면 아빠는 어김없이 용의 검사를 하셨다. 우리 4남매는 우물이 있는 마당 앞에 한 줄로 서서 손과 발을 내밀었고, 옷차림도 점검을 받았다. 언제나 걸리는 아이는 나였다. 맨손으로 흙을 만지고 뛰놀다 집에 오면 손톱 밑은 항상 흙과 이물질로 가득했고, 미처 다 씻어내지 못한 나는 언제나 고정으로 아빠에게 혼났다.
때수건이나 샤워볼도 아닌 그릇 닦는 초록색 3M 수세미를 우물 앞에 던져주셨다. 그러면서 한 마디 덤으로 벌도 주셨다.
“나는 까마귀다” 이것을 세 번씩 소리 내어 시인하도록 했다. 언니 오빠들은 키득거리며 웃었지만, 난 혼자 밤에 청승맞게 마당에 앉아 수세미로 손톱을 씻어내는 게 조금은 수치스러웠다.
지금 생각해 보면 오빠 손톱을 확인하지 못한 것이 아차 싶다. 분명 같이 놀았으니 오빠 손톱도 때가 껴야 정상인데…. 미처 거기까진 생각을 못했다. 여하튼, 내 손톱이 더러운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그렇게 아빠의 1절 훈계가 끝나고 나면, 어김없이 2절로 진입하셨다. 이것이 내가 가장 싫어하고 아파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엄마는 왜 눈이 항상 부어있는지
“당신은 집에서 살림하면서 자식 교육을 저 모양으로 해? 얘가 지 손톱 하나 씻지 못해 어디 더러운 까마귀처럼 하고 다니지? 자식교육을 못하니 애가 만날 저렇게 칠칠맞지..”
내가 잘못할 때마다 아빠는 모든 원인을 엄마에게 전가했다. 내 행실의 방정하지 못함과 옷차림의 단정하지 못함은 모두 엄마의 가정교육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아빠의 모진 언어학대는 2절로 끝나지 않고 도돌이표를 찍으며 밤새 이어지는 날들이 많았다. 철없던 나는 잠이 들었고, 아침이 되면 엄마의 퉁퉁 부은 두 눈을 보았다. 너무 철딱서니가 없었던 꼬마여서 엄마눈이 왜 부었는지 몰랐다.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고 조금씩 성장하면서 그것은 엄마가 밤새 흘린 눈물이 남긴 흔적이라는 것을 알았다.
아빠의 출퇴근 시간에 맞춰 우리 4남매는 대문 앞에 서서 아빠를 배웅하고 깍듯하게 인사하며 가장으로서의 아빠의 권위를 지켜드려야만 했다. 자세가 흐트러지거나 옷매무새가 단정하지 않으면 그것은 모두 엄마의 잘못이었다. 얌전하고 말 잘 듣는 언니 오빠들과 달리, 난 별다른 반항을 하지도 않았는데 자세가 삐딱하거나 옷을 바지 안으로 단정하게 밀어 넣지 않았다고 혼나기도 했고, 인사를 공손하게 하지 않는다고 타박을 받기도 했다. 언제나 혼나는 아이는 나였지만, 엄마의 부은 눈을 알아차린 후부터는 아빠의 심기를 거슬리지 않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다.
그것만이 내가 사랑하는 엄마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갓 열 살이 안 된 나이에도 나는 엄마 옆에 껌딱지처럼 붙어 엄마의 심장 박동이 일정한지, 숨소리는 괜찮은지 늘 의식하며 잠이 들었다. 혹여나 엄마가 나 때문에 숨죽여 눈물이라도 흘리면 귀신보다 더 빨리 알아차리고 엄마의 눈물을 닦아주며, 엄마의 등과 팔을 부비댔다. 그렇게 엄마 품에서, 엄마 눈물에 젖어 잠든 날들이 제법 많았다.
엄마에 대한 사랑은 그렇게 커져만 갔고
그저 마음속에 그런 생각은 늘 했었다. ‘가정교육은 여자만 하나? 자기도 부모면서 왜 엄마한테만 교육하라고 하는 것이지?’하는 그런 못마땅한 마음말이다. 얼굴도 못 본 체 아빠한테 시집온 엄마는 다른 대안도 없고, 우리 4남매를 키워야 하니 그렇게 인내하며 버티고 계셨던 것 같다.
어른이 된 지금에야 엄마의 쓸쓸함과 외로움의 무게를 알 것 같다.
가끔씩 참다못해 아빠한테 말대꾸를 하는 날이면, 그날은 천지가 개벽했다. 무차별적인 분노의 화살은 결코 엄마를 비껴가지 않았다. 단 하나의 화살촉조차도 예외는 없었다. 자동 로봇처럼 바닥에 무릎을 꿇고 밤새도록 아빠 앞에서 빌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고, 왜 아빠의 마음을 거스르게 했는지 조목조목 시인하면서…. 그래야만 엄마의 밤이 조금 덜 고통스러웠으니 말이다. 그 후로도 아주 가끔 그런 날들이 있었지만 그런 날은 나의 이성은 완전히 마비되었고, 후폭풍에 대한 두려움이나 계산조차도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한 인간이 한 인간을, 남편이라는 이름으로 어떻게 저렇게 할 수 있는지 나는 분노했다. 아빠 눈엔 조막만한 어린아이였지만, 나는 사랑과 미움 그리고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 무엇인지 정도는 충분히 이해할 만큼의 사리는 있었다. 몇 날 며칠이고 멈춤 없는 고통이 지독하게도 엄마를 후비팠다. 난 아빠에게 말하고 싶었다.
‘가정교육은 엄마만의 책임도 아니고… 오히려 교육에 해가 되는 건 아빠 자체예요’
‘엄마가 1등을 하면 웃으시는구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공부밖에 없었다. 어린 생각에 그랬다. 죽도록 공부를 했다. 엄마가 웃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밤을 지새워도 고단하지 않았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언어 능력도 있었지만, 몸부림치며 공부한 탓에 중학교 3학년 때는 이미 타임지를 능숙하게 읽을 실력이 되었고, 더 이상 공부할 교과목들조차 없었다. 그랬다. 그래도 공허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없어서…
열여섯 살, 나는 하루에 30분 이상 잠을 자본 적이 없었다. 많이 아파 학교도 거의 가지 못했지만, 잠이 들면 이대로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이 계속 깨어있게 했다. 그 긴 긴 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공부, 음악 듣기, 그리고 목구멍을 뚫고 토할듯한 저 가슴 밑바닥의 정제되지 않은 분노와 설움, 그리고 애타는 간절함을 밤새도록 써 내려가는 것뿐이었다. 그러다 창문을 열어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책상에 엎드렸다 언 몸을 일으켜 떠오르는 태양을 보고 가슴이 벅차 또 뜨거운 눈물을 쏟았다. 찬란한 태양이 너무도 아름다워서 그리고, 내가 오늘도 살아있어서…
고단하다는 느낌도 없이 밤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엄마한테 아침 인사를 건네었던 날들이다. 엄마가 걱정할까 봐 이불을 뒤집어쓰고 스탠드를 켜놓고 숨죽여 밤을 보냈던 시간들…. 그렇게 공부하면서 성적은 전국 1%를 벗어나 본 적은 없었다. 그중 영어만큼은 언제나 다섯 손가락 안에 들었다. 엄마는 그런 성적표를 보고 너무도 기뻐하셨다. 그럴 때마다 공부한 보람은 있구나 싶었다.
엄마의 곁을 잠시 떠나려니
대입을 코앞에 둔 시간, 아빠는 내가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여자가 기본만 하면 되지 무슨 공부가 필요해. 남편 잘 모시고, 아이 잘 키우면 되지. 밤늦게까지 불 켜놓고 왜 공부를 하는 거냐?”
다른 부모들은 조금이라도 더 공부하라고 하는데 아빠는 내가 공부하는 것을 막으셨다. 서러웠다. 그래도 평균 99.9의 성적표를 보며 환히 웃는 엄마를 생각하며 귀를 막았다. 개구리가 돌에 맞아 죽듯, 대뜸 던지는 아빠의 한 마디 한 마디는 참 쓰렸다. 집에 들어갈 때면 습관적으로 귀마개를 했다. 듣고 싶지 않아서,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 아빠의 잔소리가 더 심해지고 집에서는 더 공부할 수 없어 용기를 내어 독서실을 가겠다고 했다. 엄마는 그러라고 처음엔 그러셨다.
사실 공부 때문도 있었지만, 내가 흘리는 눈물을 엄마가 보게 하고 싶지 않았다. 엄마의 눈물을 이해했던 나는 너무 철이 일찍 들어서인지 엄마 앞에선 절대 울지 않는 아이로 성장했다. 지금도 그렇다. 혼자 있을 때 실컷 울고, 집에 올 때는 목소리도 표정도 충분히 튜닝된 상태로 왔다. 나의 눈물을 엄마가 아셨는지는 지금도 모른다. 엄마 앞에서 울어본 적 없는 나를 보고 엄마는 내가 참 얼음처럼 차갑다는 말씀을 많이 하셨다. 감정이 없는 아이처럼, 바늘처럼 날카로워 가까이하기에 너무 어렵다는 말씀도 같이 말이다. 피를 나눈 언니도 나를 늘 얼음공주라고 한다. 지금도 말이다. 그 정도면 나는 훌륭한 연기자가 분명했다.
그러나 가슴에 늘 구멍이 뚫려있는 것처럼, 참 쓸쓸하고 외로웠다. 홀로 눈물을 삭이고 하늘 앞에 나아가 조용히 기도하는 것 외에는, 달리 내가 설음을 쏟아낼 길은 없었다.
독서실에선 누가 간섭하는 사람이 없으니 숨을 쉴만했다. 하교 후, 옷을 갈아입고 독서실로 나가는 순간이 되면 엄마의 얼굴은 급 어두워졌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난 어느 밤에 엄마가 맨발로 뛰쳐나와 나를 확 끌어안으셨다.
“꼭 그렇게 나가야만 하느냐. 왜 엄마 곁을 떠나려고만 하니. 집에서 공부하면 안 돼?”
통곡하듯 뜨거운 눈물을 쏟아내던 엄마는 바닥에 그저 주저앉아 버리셨다. 내가 없는 집에 아빠와 단 둘이 있는 것이 엄마에게 얼마나 큰 고통이었는지를 그제서야 알았다. 엄마를 모셔다 드리고, 독서실에서 짐을 챙겨 집으로 돌아왔다.
꼭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님을
열여덟 살, 꿈 많고 감수성이 충만한 나이의 소녀였어야 할 나. 그 수 많았던 밤들을 생각에 생각을, 또 결심에 결심을 하며, 뜨거운 눈물을 토해내며 그저 일기장에 같은 말만 끄적였다. 맥락도 없는 나의 감정들을 미친 듯이 쓰고 또 쓰고… 그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였다.
집으로 돌아와 찬물로 세수를 하고 엄마 손을 잡고 차분하게 말을 했다.
“엄마, 이렇게 엄마랑 함께 있을 때는 내가 눈앞에 보이니 좋지? 내가 안 보일 때는 눈을 감아봐. 그럼 내가 더 잘 보여. 그러니까 나는 늘 엄마 곁에 언제나 함께 있어”
그랬다. 앞이 안 보이면 눈을 감고 칠흑같이 어두운 삶의 터널을 걸어 나왔고, 엄마가 그리울 땐 눈을 감고 생각의 손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내 작은 손으로 엄마의 두 손을 꼭 쥐었다. 엄마에게 나는 그런 작은 우주였다.
Sep13,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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