룸메이트가 된 길고양이

그저 공간 하나 내어주는 것이지만…

함께 산다는 것은

함께 산다는 것은 참으로 많은 노력과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집 두고 노숙하는 고양이가 너무도 가여워 방안으로 강제 이주를 시킨 지 3일째다. 처음에는 노숙하던 한 마리만 데려왔는데 지금은 두 마리로 늘었다. 찡찡이와 호순이는 암고양이로 서로 사이가 좋지는 않다. 둘 다 길고양이 출신으로 입양한 지 몇 해가 된다. 찡찡이를 내 방으로 강제 이주시킨 지 하루가 되던 날 아침 호순이는 현관 앞으로 와서 야옹거리더니 금세 찡찡이를 발견하곤 잽싸게 방으로 들어왔다. 그러고 나선 찡찡이 자리에 와서 몸을 녹이고 나서 찡찡이를 밀어냈다. 찡찡이가 걱정돼서 찾으러 온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찡찡이가 이곳에서 뭐 하지라는 호기심은 더욱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눈에 보이지 않으니 어디 있나 하고 찾으러 온 것 같다.

고양이니까 그렇지

둘 다 개냥이는 아니라서 밥 주고 가끔 ‘궁디팡팡’해주는 것 외에 별달리 가까이할 일이 없었다. 고양이에 대한 지식도 없을뿐더러 품에 안다가 발톱에 할퀸 뒤로는 가급적 적정 거리를 두고 지낸다. 독감으로 명절 내내 앓아누웠다가 간신히 기력을 찾았는데, 고양이 때문은 설마 아니겠지만 한 이틀을 다시 앓았다. 마음이 쓰여 밤잠을 설치기도 했고, 코를 골며 네 다리 쭉 뻗고 자는 아이들이 측은해 다시 살펴보다 다시 잠이 들기도 했다. 내가 깊이 잠이 들면 고양이들은 이리저리 탐색하는 것 같았다. 새벽에 소리가 나 눈을 떠보니 한 마리는 의자에 다른 한 마리는 창가에 올라가 있다. 고양이니까! 에휴….

방 안 군데군데 떨어진 흙과 고양이 털, 그리고 패브릭 소파에 남겨놓은 흔적들. 이해는 하면서도 약간 신경이 거슬리기 시작한다. 이런 나를 보면서 문득 ‘공존’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본다. 사람은 더할 것도 없지만 특히 동물과 공존한다는 것은 그저 ‘너는 너’, ‘나는 나’가 아니라 ‘너와 내’가 함께 양보하고 살아야 하는 삶이라는 것을 느낀다. 고양이들에게 많은 것을 바랄 수는 없지만, 어쩌면 그들도 나를 생각해서 내가 깊이 잠든 밤에만 돌아다니는 것일지도 모른다. 긁는 것이야 타고난 것이니 내가 이해해야 할 몫인 셈이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같은 공간에서 함께 호흡하고 빈 곳을 내어주는 것, 그리고 맑은 물과 양식을 주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대단한 무엇을 요구하는 것도 아닌데 내 영역을 나누어 쓴다는 것이 어찌 쉽지만은 않다.

공존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

길고양이도 그렇다. 사람들 통행에 지장이 없게 밥을 주고, 핫팩을 넣어주며 생명의 온기를 더해주는 캣맘들이 우리 마을에도 있다. 그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아파트 단지며 마을이며 빗자루를 들고 청소한다. 빗발치는 민원 때문이다. 그들은 고양이가 가여워 청소를 자청하고, 매일 지역을 돌며 고양이를 돌본다. 그들에겐 이것이 길고양이, 그리고 마을 주민들과 공존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다. 또한, 길고양이를 싫어하는 주민들은 캣맘들이 나서서 거리를 청소하고 밥을 먹이니 그들을 대놓고 반대하지는 않는 나름의 공존이다.

손가락도 길고 짧고 모양이 다 다르다. 그런데도 내 손가락인지라 아무렇지도 않고 기능도 쓰임도 다르니 너무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사람도 환경도 그런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참 좋겠다.

작은 깨달음

3일 동안 고양이 룸메이트와 방을 나누어 쓰면서 깨달은 것이 좀 있다. 작게는 가정에서, 직장에서 그리고 사회에서도 말이다. 개성도 생각도 모두 다르다. 그러나목적은 하나다. ‘존재하는 것’, 그리고 ‘사는 것’ 하나다. 살자고 하는 일인데 내가 살고 싶듯이 상대도 살고 싶다는 것 그거 하나만 인정하면 될 일인데. 그게 참 쉬운 일이 아니다. 나를 공존의 대상으로 삼고 함께 사랑하며 살아준 가족과 주변의 사람들에게,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Feb 02.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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