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눈물, 웃게 해 줄 수만 있다면…(1)

지금 이 순간 생각나는 사람

소리 없이 와서 바위 위에 폭 앉아 머물러버린 눈처럼 비가 차분히도 잔잔하게도 내린다. 아침 출근길에 한 사람이 뇌리를 스쳐간다. 나의 깐부이자 선배인 20년이 넘은 지기이다. 값나가는 수많은 몽블랑 펜이 있어도 천 원짜리 검정색 제도 샤프를 늘 셔츠에 꽂고 다녔던 그는 언제나 청바지에 체크 남방 차림이었다. 별다른 액세서리를 하지 않아도 그는 언제나 빛이 났다. 내 기억에는 그렇다. 모델을 능가하는 훤칠한 키와 외모는 글로벌 스탠더드를 넘어섰고, 덕분인지 그의 주변에는 항상 그녀들이 끊이지 않았다.

90년대 나의 대학시절

지금도, 23년 전에도 그는 나의 깐부였다. 일로 만난 사이였지만 알고 보니 그와 나 사이에는 많은 공감대를 나눌 매개체가 몇 있었다. 고등학교 때까진 난 모범생 중의 모범생으로 오로지 공부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었지만 대학 입학 후에는 아예 다른 사람이었다. 이름은 있으나 얼굴을 아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학과사무실이나 수업에는 가지 않았고, 캠퍼스 밖을 누비며 음악카페를 전전하거나 하루 종일 캠퍼스 잔디에 앉아 그림만 그리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교수님들은 이런 나를 이해해 주셨고, 지지해 주기도 하셨다. 과 동기들과 별로 소통을 하지 않고 나만의 세계에 푹 빠져 살았던 나를 동기들은 어려워했고 선배들은 나를 수배하러 캠퍼스를 뒤지고 다녔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내 인상이 매우 강렬했던 탓인지 총학에서는 나를 운동권에 스카우트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술도 못 마시고, 정치나 사회 이슈에 관심도 없었던 순진하기만 하던 나를 뭘 보고 그랬는지 당시에는 이해를 못 했지만… 어쩌면 선견지명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난 불의나 부당함에 고개를 숙이는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할 말은 해야 했고, 아닌 것을 아니라고 언제나 말을 해왔다. 불이익에 대한 두려움도 없었고, 그렇게 인생을 살아보지도 못했다. 그런 점에서는 일정 부분 진보적 성향을 가지고 있는 것도 맞겠지만… 난 운동권 생각은 전혀 없다.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말이다. 한 번은 기차를 잘못 탔다가 경찰에 연행되어 1박 2일 조사를 호되게 받은 적도 있었다. 순진해서 잡아간다고 잡혀갔던 것을 생각하면…. 미란다고지도 없었고 내가 현장에서 수배될 이유도 전혀 없었다. 1995년 당시 내가 탔던 기차에 월북을 동요하는 운동권 학생들이 있다는 제보를 받은 백골단 아저씨들은 포대에 물건을 쓸어 담듯 나까지도 경찰로 연행해 강도 높은 조사를 했다. 어두운 밤 조사실에는 여러 명의 수사관과 나 한 명뿐이었다. 옆 방에서는 각종 비명과 욕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침이 되어 풀려났지만 그들은 한마디의 사과도 없었다.

잠시간의 낭만

빛과 어둠이 공존하듯 당시에도 대학가는 언제나 감성이 충만했다. 클래식 음악만을 틀어주는 LP음악다방도 있었고, 뮤직비디오를 틀어주는 카페나 레스토랑도 많았다. 술냄새를 좋아하지 않는 나는 bar나 클럽을 찾지 않았지만 그런 중에도 찾던 술집이 있었다. 1억이 넘 각종 저음 스피커와 우퍼, 그리고 고퀄의 음향장비들이 있었고 정기적인 라이브 공연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 술집 건너편에는 클래식한 레스토랑이 있었고, 당시 우리들에겐 중요한 이벤트가 있을 때나 예약해서 갈 수 있는 곳이었다. 호텔을 능가하는 품격 있는 인테리어와 음악, 디제잉, 그리고 격조 높은 서비스는 말 그대로 ‘어떤 작업’이라도 먹힐듯한 그런 공간이었다.

선배와의 인연

참고이미지: 밀레니엄락페스티벌(출처:unsplash)

친한 언니가 급하게 밀레니엄 록음악 페스티벌을 언니 친구가 준비하고 있는데 통역에 펑크가 났다며 나에게 긴급 콜을 했다. 그때 만난 사람이 선배 A였다. 당장에 50여 개국에서 온 뮤지션들을 대상으로 통역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 압박감 있는 일 앞에 A는 매우 차분했다. 페스티벌 현장은 정신없이 돌아갔지만 무대 뒤편 사무실에 있던 그는 실행 파일과 큐시트, 그리고 주요 의전대상이 적힌 서류를 검토하며 딴 세상에 있었다. 내가 그의 찐으로부터 소개받은 매물이니 의심의 여지는 없었겠으나 그는 나의 언어능력이나 커리어에 대해서는 전혀 묻지 않았다. 감성이 끌리는 대로 대화를 했던 탓인지 대학시절 이야기가 나왔다. 내가 좋아했던 음악, 그리고 내 감성을 지배했던 기억 속의 그 라이브카페와 레스토랑 이야기를 소환했다.

나는 A가 누구인지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사업가이자 공연기획자라는 정도 외에는 말이다. 신나서 이야기하는 나를 그는 참 귀엽게 쳐다보았다. 지금도 기억이 선하다. 알고 보니, 그 라이브카페와 레스토랑은 그가 운영하던 사업체 중의 하나였고, 또 같은 대학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A와의 인연은 시작되었고, 그도 나도 서로의 인생에 무게 있게 관여하는 인생의 찐친이 되었다. 그는 언제나 나를 ‘김형’이라고 불렀다.

그때의 인연으로 7년 정도는 더 이상은 할 수 없을 만큼 같이 일을 했고 과정 중에는 숨이 멎을 만큼의 고통스럽고 아픈 순간도 많았다. 험난한 파도를 같이 탔고, 위태로운 순간에도 한 조각 판자라도 같이 붙잡고 바다를 해쳐 나와 생존하기도 했었다. 그가 생사를 넘나들며 사투를 벌이는 순간에도 인생의 막다른 절벽에 서있을 때도 그 모든 과정을 어쩌면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았던 사람이 아마도 나였을지 모른다. 그러하기에 지금도 우리가 찐친으로 남아 서로의 인생을 응원하며 각자의 레이스를 뛰고 있을 것이다.

동상이몽, 가슴이 뛸 수 없어..

밀레니엄 페스티벌에서도 그는 그런 이야기를 했다. 가슴이 뛰는 일을 하고 싶다고… 문화예술계에서 일했던 그는 늘 이카루스처럼 그렇게 열정을 태우며 일하고 싶어 했다. 그의 크루들은 언제나 그 업계에서 막강했고 프라이드는 하늘을 찔렀다. 그의 사무실은 불이 꺼지는 법이 없었다. 그런 그의 동료들을 위해 그는 물심양면으로 모든 것을 쏟아부었고 업계에선 아마 최고의 연봉과 복지 수준을 제공했다. 열정군단으로 뭉쳐진 그의 동료들을 그는 무척이나 사랑했고, 그는 가진 모든 것들을 쏟아부었다. 사업에 문외한인 나였지만 문득문득 그와 그들의 꿈은 다른 것만 같았다. 그런 예감이 틀리지는 않았던 탓인지 그는 모든 것을 결국 잃었다.

그럼에도 사랑했던 동료들이기에 그는 원망이나 서운함 한 조각조차도 표현하지 않았다. 말의 무게가 무거웠던 그는 한마디 한마디의 말에 언제나 책임지는 사람이었고 장고에 장고를 거듭하는 사람이었다. 아파도 아프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는 그런 사람이었다. 모두가 잠든 새벽시간 날이 밝아올 때까지 홀로 사무실에 앉아 마지막을 정리했고, 아무 일 없다는 듯 직원들을 맞이하고 그의 길을 유유히 갔던 그였다.

출처:unsplash

웃게 해 줄 수만 있다면

아프다는 말 조차 하지 않는 그가 참으로 안타까웠다. 그런 그도 사람이라 그랬는가… 지금처럼 비는 아니지만 눈이 차분히 도 내리는 그런 날이었다. 맨손으로 내리친 거울은 와장창 깨져있었고, 그는 아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외인부대 지원까지도 했던 강인한 그가 말이다… 어떤 위로조차도 해주지 못한 채 그저 옆에서 바라만 보았던 나 자신이 참 민망해졌다. 어떻게 위로해줘야 할지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나는 몰랐다.

출처:unsplash

그저 그가 다시 일어설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것 외에는 말이다. 다친 손에 붕대를 말없이 감아주는 내 마음이 더 먹먹했다. 차라리 대신 아파줄 수 있다면 좋으련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그리고 그 전해지는 아픔과 상실감에 내 마음은 타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난생처음 남자의 눈물을 보았다. 남자도 우는구나… 그를 웃게 해주고 싶었다. 그 상실감을 내가 어떻게 보상해 줄 수는 없지만, 그 눈물이 너무도 쓰라려 그저 그가 웃을 수 있다면 좋겠다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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