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의 한 공동체 마을에 집을 보러 갔다. 대안학교를 중심으로 형성된 곳으로, 같은 종교와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마을단지를 형성했다. 넓은 마당에 목조주택, 아름드리나무와 여름 햇살 가득 머금은 정원의 꽃들까지. 누구라도 한 번쯤 살아보고 싶다고 생각할 만한 풍경이었다. 그런데 돌아오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저 마을에서 내가 살 수 있을까. 아니, 더 정확하게는 저 아름다움을 누리기 위해 그 공동체의 삶의 방식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생각해 보면 그곳 사람들은 집을 산 것이 아니었다. 삶의 방식을 선택한 것이었다. 삶의 기준이 집보다 앞서는 곳이었다. 학교를 먼저 선택했고, 이웃을 선택했고, 공동체를 선택했다. 집은 그 부수적인 결과물에 가까웠다. 우리가 보통 집을 고를 때 따지는 것들, 접근성, 문화시설, 평수와 가격 등과 같은 것은 이 마을에선 두 번째 질문이었다. 첫 번째 질문은 따로 있었다. 어떤 사람들과 살 것인가, 어떤 삶을 살 것인가. 도시에서는 좀처럼 하기 쉽지 않은 질문이다.
공동체가 싫은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마을에 정착하는 모습을 상상하니 선뜻 자신이 생기지 않았다. 소속이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연결과 소속은 다르다. 연결은 내가 선택하는 관계다. 오늘 참여하고 내일 쉬어도 된다. 마음이 맞으면 가까워지고, 그렇지 않으면 거리를 둘 수도 있다. 소속은 다르다. 소속은 내가 어디에 속하는지를 전제로 한다. 들어가는 순간 그 공동체의 리듬과 가치관, 방향을 일정 부분 함께 받아들여야 한다.
러닝크루는 좋지만 매주 참석을 강요받으면 탈퇴하고 싶어지는 것. 이웃과 다정하게 인사는 나누고 싶지만, 서로의 냉장고 사정까지는 알고 싶지 않은 것. 연결되고 싶지만, 그 연결이 나라는 존재를 완전히 규정하는 것은 원하지 않는 마음. 이것이 비단 나만의 감각은 아닐 것이다.
최근 들어 이런 공동체 실험이 낯선 일은 아닐 것이다. 전국 곳곳에서 공동육아 마을이 생겨나고, 대안학교를 중심으로 한 정주 공동체가 만들어지고 있다. 한편에서는 러닝크루가 도시의 밤거리를 달리고, 독서 모임이 카페를 채우고, 공유주택과 코하우징이 새로운 주거 방식으로 등장하고 있다. 사람들이 모두 혼자 살고 싶은 것은 아니다. 다만 기존의 방식으로 소속되고 싶지 않을 뿐이다.
사회학자 게오르크 짐멜(Georg Simmel)은 1908년 ‘이방인’에서 ‘오늘 와서 내일 떠나는 사람이 아니라, 오늘 와서 내일도 머무는 사람. 가깝지만 완전히 속하지 않는 존재’를 이방인으로 정의했다. 그 글을 쓴지 약 100년이 넘었지만 지금 우리가 느끼는 감각은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 이방인은 예외적인 존재가 아니라 도시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기본 조건에 가깝다. 1인 가구는 계속 늘어나고, 고독사는 사회 문제로 떠오른다. 그러나 동시에 사람들은 모임을 만들고, 커뮤니티를 찾고,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를 실험한다. 고립은 두렵지만, 강한 소속도 부담스러운 것이다.
모순처럼 보이는 이 두 흐름은 사실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완전히 소속되지 않으면서도 연결되고 싶다는 것. 짐멜은 현대인이 추구하는 자유의 핵심을 선택 가능성에서 찾았다. 언제든 들어갈 수 있고, 언제든 나올 수 있는 것. 소속 자체가 싫은 것이 아니라, 나올 수 없는 소속이 부담스러운 것이다.

그런데 공동체의 입장에서 보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진다. 공동체는 원래 경계를 가진다. 그것은 배타성이라기보다 스스로를 유지하기 위한 방식에 가깝다. 같은 경험과 언어를 공유할수록 결속은 강해진다. 공동체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공통된 가치와 신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경계가 지나치게 단단해질 때다. 공동체가 스스로를 지키는 일과 새로운 사람을 받아들이는 일 사이의 균형을 잃게 되면, 연결보다 소속이 앞서기 시작한다. 안에 있는 사람과 밖에 있는 사람의 구분이 선명해지고, 이방인은 머물 수 없는 존재가 된다.
그 마을을 걸으며 그것을 생각했다. 집은 살 수 있었다. 풍경도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 집과 함께 따라오는 삶의 방식을 선택하고 또 언제든 내려놓을 수 있기는 어려웠다. 짐멜은 이방인이 공동체에 필요한 존재라고 했다. 완전히 소속된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이방인은 보기 때문이다. 너무 가까우면 보이지 않는 것을 적당한 거리에서 바라볼 수 있고, 공동체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을 다시 질문할 수 있다. 공동체 안에 완전히 들어가 있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그 모습을 더 선명하게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좋은 공동체란 과연 무엇일까. 모든 사람을 같은 모습으로 만드는 공동체는 아니다.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방식으로 살아야만 머물 수 있는 곳이라면 공동체는 강해질 수는 있어도 확장되기는 어렵다. 앞으로의 공동체는 다른 방향으로 진화해야 할지도 모른다. 완전한 소속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서도 연결될 수 있는 곳. 언제든 들어올 수 있고, 필요하면 물러날 수도 있는 곳.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아도, 같은 삶을 살지 않아도 서로를 존중할 수 있는 곳.
도시는 원래 그런 공간이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각자의 거리를 유지한 채 살아가는 곳. 그래서 미래의 공동체는 모두가 하나되는 마을의 방식보다, 다름을 인정하면서 연결되는 도시의 방식에 더 가까워질지도 모른다.
고립은 싫고 소속은 부담스러운 시대다. 사람들은 여전히 누군가와 연결되기를 강하게 원한다. 다만 자신의 삶 전체를 하나의 공동체에 맡기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좋은 공동체란 사람을 붙잡아 두는 곳이 아니라, 언제든 다시 찾아올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미래의 공동체는 결속의 강도가 아니라, 이방인을 품을 수 있는 넉넉함으로 평가받게 될지 모른다.
출처: 디지털타임즈(오피니언/칼럼)
입력 2026-06-17 16:16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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