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들립공존연구소

밝은 도시가 채워주지 못하는 빈자리
언제 마지막으로 하늘을 올려다 봤나
환한 세상에서 더 외로워지는 이유들
빛공해 시대에 우리가 놓쳐버린 풍경

순백의 고혹적인 찔레꽃 향기가 진하게 배어나고, 보랏빛 오동나무 꽃이 한 두 송이 똑똑 떨어져 발길을 멈추게 하는 계절이다. 질세라 반딧불이가 이따금 보이고, 지자체마다 ‘반딧불이를 보러 오세요’, ‘별이 보이는 마을로 떠나세요’ 하는 안내가 늘어난다. 도시인들은 차를 몰고, 캠핑 장비를 챙겨 가족과 함께 멀리 떠난다. 살아 있는 그 빛을 보기 위해.

우리 집 마당에서는 이따금 반딧불이가 보인다. 풀섶 사이로 작은 빛이 깜빡거리며 날아다니는 것을 보면, 이 작은 생명이 어떻게 스스로 빛을 내는지 신비로울 따름이다. 언덕과 들판이 사방으로 펼쳐진 이곳에서는 아침 해가 뜨는 것도 노을이 지는 것도, 그리고 밤하늘의 별을 보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시침을 따라 하늘의 빛깔과 질감이 달라지고, 공기의 무게도 냄새도 각각이다. 하나의 공간이 이리 다채로울 수 있다는 것은 깊이 들여다봐야 누릴 수 있는 풍요임에는 틀림없다. 그 풍경 속에 오래 서 있다 보면 잊고 지내던 감각들이 천천히 깨어나는 듯하다.

매일 그 하늘을 넋을 빼고 바라보노라면 바람 속에서 은밀하게 풍겨나는 비 냄새를 맡을 수 있고, 피부에 물드는 하늘빛으로 내일 날씨도 가늠할 수 있다.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정확하다. 한순간도 같지 않은 하늘, 매일 다른 하늘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우리도, 만물도 살아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도시에 사는 현대인들은 아침마다 스마트폰을 켠다. 오늘의 기온, 습도, 미세먼지, 초미세먼지. 감각보다 먼저 과학적으로 측정된 공기의 질, 온도, 습도를 보고 오늘의 날씨를 뇌 속에 입력한다. 그리고 창문을 열어 그것을 감각으로 한 번 더 확인한다. 공기가 항상 깨끗하지는 않기에 마스크를 써야 하는지, 아이들이 야외활동을 해도 안전한지 확인해야 한다. 신묘한 도시인의 생존 도구임이 틀림없다.

다만 이 편의가 어느 순간부터 우리의 감각보다 우선하게 되었다. 창밖을 한 번 내다보기 전에 먼저 화면을 본다. 정확한 숫자가 알려주지 못하는 것이 있다. 오늘 노을의 색, 공기에 실린 어떤 계절의 냄새, 별이 유난히 밝은 밤의 그 청신하면서도 묵직한 청량함 말이다.

40년이 넘도록 도시에 살았다. 엑스포, 올림픽 같은 화려한 행사를 위해 밤을 새우면서도 밤하늘을 제대로 본 기억이 나질 않는다. 별이 보이지 않는 빽빽한 환경에서, 별은 동화책에나 있는 듯 살았다. 도시를 떠나보니 별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내가 고개를 들어 쳐다보지 않았던 것임을 깨달았다. 물론, 고개를 쭉 뺀들 별을 볼 수 없는 곳도 있지만 말이다.

2016년, 이탈리아와 독일, 미국 등 국제 공동 연구진이 위성 사진으로 전 세계의 빛공해 실태를 분석한 적이 있다. 한국은 G20 국가 가운데 빛공해가 가장 심각한 나라다. 국토의 약 89%가 빛에 잠겨 있었다. 세계 인구의 80%가 인공조명 때문에 맑은 밤하늘을 보지 못하고, 세 명 중 한 명은 평생 은하수를 볼 수 없다고 했다. 한반도를 위성에서 내려다본 사진을 보면 그러하다. 휴전선 아래로 환하게 빛나는 남쪽, 그 위로 어둠이 내려앉은 북쪽.

빛은 도시의 생명선이고, 자본주의 도시의 밤은 언제나 밝다. 기업과 상점이 열을 내어 홍보하고, 안전을 위한 가로등과 거리 시설물들은 빛을 내야만 한다. 늦은 밤까지 이어지는 경제 활동과 24시간 멈추지 않는 도시의 리듬은 이 빛 위에서 유지된다. 환한 불빛은 어느새 도시의 경쟁력으로 자리 잡았다. 우리가 선택한 밝음이다.

천문학자들이 말하길, 별은 낮에도 떠 있다고 한다. 낮에 별을 보지 못하는 것은 태양빛이 너무 강해서이고, 밤하늘의 별빛은 도시의 현란한 빛에 묻혀서다. 밝아서 안 보이는 것이다. 도시는 ‘가짜 낮’을 만들어낸다. 어둠을 잃은 것이 아니라, 별을 가릴 만큼 밝은 빛을 얻은 것인데 씁쓸한 까닭은 과연 무엇일까.

별은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다. 다만 볼 수가 없을 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반딧불이를 찾아 떠나는지도 모른다. 별 관측을 위해 밤을 지새우고, 그런 마을을 찾아 나선다. 그렇게 만난 별 앞에서 사람들은 잠시 말을 잃는다. 와, 별이 이렇게 많았구나. 아이들은 환호를 지르고, 어른들은 어릴 적 기억 속의 밤하늘을 떠올려 본다. 별빛과의 그 짧은 만남이 일상에 깊은 위로로 두고두고 남는다. 물리적으로 밝은 도시, 마음의 등에 일일이 빛을 나눠주지는 못한다.

쏟아지는 정보, 꺼지지 않는 화면, 멈추지 않는 일. 그 모든 것이 마음의 공간을 덮어버린다. 그러니, 무언가에 감동하는 일이 줄어들고, 어떤 풍경 앞에 가만히 멈춰 서는 일이 드물게 된다. 깊은 밤 한 권의 책을 즐길 여유도 없다. 오늘 본 하늘이 어땠는지 기억조차 안 날 만큼 바쁘게 살다 하루가 지나가 버린다. 그것이 매일이 된다.

칼 세이건은 우주 밖에서 찍힌 지구를 ‘창백한 푸른 점’(Pale Blue Dot)이라 불렀다. 우주에서 보면 우리는 먼지보다 작은 존재다. 그 작은 점 위에서 우리는 삶에 복닥거리며, 자신만의 우주를 만들며 살아간다. 그리고 문제는, 그 안에서 한없이 더 작아지는 우리들 자신이다.

기이한 일이다. 우주의 관점에서 보면 겨우 먼지 한 톨에 불과한 이 지구 안에서, 우리는 왜 그토록 눈이 멀 정도로 불빛을 밝히며 아등바등 살아가는 걸까. 정작 우리를 품고 있는 거대한 우주의 진짜 빛은 지워버린 채.

낮에 뜬 별이 밤에 지는 것이 새삼 놀라운 일도 아니다. 도시라는 공간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이 거대한 인공의 빛에 매몰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한 몸부림인지 모른다. 그러려면 우리는 빛 속에서 별을 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보이지 않을지라도. 그리고 밤에 지는 별을, 마음에 붙잡아 두는 법을.

출처: 디지털타임즈(오피니언/칼럼)
입력 2026-05-20 16:06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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