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나가야 했던 노인의 10분
문은 열렸지만 머물 수 없는 공간
지하철이 유일한 안식처 된 사회
가장 낮은 곳을 덥혀야 공존한다
얼마 전, 한 도서관에서 목격한 장면이다. 뼛속까지 시리는 바람을 피해 로비로 들어선 어르신이 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행색이 남루한 어르신은 출입문 앞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으셨다. 그저 붉게 언 두 손을 호호 불며 몸을 녹이고 계셨다.
5분쯤 지났을까. 주변의 공기가 미묘하게 달라졌다. 옆자리 사람이 슬쩍 자리를 옮겼다. 누군가는 힐끔거렸다. “나가세요”라고 말한 사람도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10분을 버티지 못한 채 다시 추운 거리로 나섰다. 쫓겨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나간’ 것이었다.
‘공간의 수치심’(Spatial Shame)이라고 해야 할까? 직접적인 말은 없었지만, “당신은 이 쾌적한 공간에 어울리지 않는 존재”라는 무언의 압박. 이 ‘소프트 바리케이드’가 그 어르신을 걸어 나가게 한 것이다.
요즘 날씨는 영하 10도 정도는 따뜻하다는 소리가 나올 만큼 혹한이다. 칼바람이 빌딩 사이를 매섭게 지날 때, 도시의 온기는 ‘구매력’의 영역에 자리를 내어준다. 카페의 안락한 소파, 상업 빌딩의 훈훈한 로비, 심지어 일부 시설은 공중화장실조차 비밀번호를 요구한다. 손에 쥔 따뜻한 커피 한 잔의 영수증, 혹은 사회적으로 용인 가능한 드레스 코드가 아니면, 그 온기를 누리기는 어렵다.
이렇게 상업 시설이 ‘이용객’과 ‘비이용객’을 가르는 것은 자본주의의 정당한 권리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 배제의 논리가 도시의 마지막 보루인 공적 공간까지 장악할 때, ‘돈없이 맞는 추위’는 자그마한 등 하나 붙일 곳도 허락하지 않는다.
행정안전부와 지자체는 매년 겨울 ‘한파 쉼터’를 지정한다. 도서관, 주민센터, 경로당 등 공공시설이 그 역할을 맡고 있다. 서울시에만 약 4000개소가 넘는다. 도서관 유리문에도 ‘한파 쉼터’라는 파란 스티커가 선명하게 붙어 있다. 이곳이 추위를 피할 수 있는 공적 공간임을 알리고 있다. 그러나 그 안내 표식이 누구에게나 편안한 초대장이 되는지는 또 다른 문제다.
‘행정적 지정’과 ‘심리적 접근’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스티커가 붙은 문 안쪽에는 여전히 ‘정숙’, ‘청결’, ‘독서’라는 엄숙한 기능을 요구한다. 매끄러운 대리석 바닥 위로 행색이 남루한 이용자가 쉽게 들어서질 못한다. 기능적 문은 열렸지만, 공간의 문법은 기능과는 따로인 셈이다.
우리 사회는 혹시 쾌적함을 위해 가난하거나 약해 보이는 존재를 시야에서 지우려는 ‘시각적 정화주의’(Visual Purification)에 중독된 것은 아닐까. 불쾌한 것을 보지 않을 권리가, 불쾌한 처지에 놓인 이들의 머무를 권리보다 우선하는 도시. 그곳의 온도는 연중 영하권에 있다.
출처: 디지털타임즈(오피니언/칼럼)
입력 2026-01-28 17:26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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