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들립공존연구소

병든 사과나무처럼 공동체도 연결 끊기면 죽는다
문학이 먼저 포착한 ‘정서적 생태계로서의 삶터’
아파트 숲과 간판 넘어서 사람들 잇는 공간으로
스마트폰 잠시 내려놓고 일상을 다시 감각하라

최근 충북의 사과밭에 과수 화상병이 퍼졌다. 이 병은 세균이 나무의 혈관과도 같은 체관부를 타고 순식간에 번져, 한번 감염되면 나무를 뿌리째 뽑고 주변 토양까지 모두 갈아엎어야만 확산을 막을 수 있다. 한 그루의 병든 나무는 이웃 나무와 토양, 공기까지 오염시키며 생명의 순환 고리 전체를 위협하기도 한다.

도시의 운명도 이와 다르지 않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공간, 자연과 삶을 잇는 보이지 않는 연결이 단절될 때, 도시는 서서히 병들어간다. 겉으로는 화려한 고층 빌딩과 분주한 거리가 생명력을 자랑하는 듯 보이지만, 그 이면에 정서적 교감이 메마른 고단한 얼굴과 단절된 관계만이 남는다면 그곳은 더 이상 안식처가 아닌 거대한 ‘피로 공간’일 뿐이다. 도시의 건강은 정서적 연결이라는 보이지 않는 토양 위에 세워진다. 그 토양이 척박해지고 오염되면, 아무리 화려하고 견고한 건축물도 결국 사상누각에 불과하게 된다.

100년 전, 제1차 세계대전이 휩쓸고 간 1920년대의 유럽은 물리적·정신적 폐허 그 자체였다. 포화 속에서 낡은 질서와 신념 체계는 붕괴했고, 수많은 젊음이 전장에서 스러져 갔다. ‘길 잃은 세대’가 불안과 허무 속에서 헤매던 시대, 무너진 것은 건물만이 아니었다. 공동체는 해체되었고, 사람들은 깊은 고립과 상실감 속에 흩어졌다. 그럼에도 인간은 본능적으로 연결을 갈망했다. 폐허 위에서 다시 거리를 걷고, 공원을 지나며, 도시의 리듬 속에서 타인의 존재를 감각하고 끊긴 정서의 흐름을 되살리려 애썼다.

영화 ‘프렌치 수프’(2024)는 바로 이러한 시대적 감수성을 품은 소설을 현대적 시각으로 재해석한다. 영화는 미각과 촉각, 소리와 향기가 어우러지는 요리의 과정을 통해 관계의 본질을 탐구한다. 특히, 영화 속 ‘접지봉’을 땅에 꽂는 장면은 단순한 과거 농업 기술의 재현을 넘어선다. 그것은 단절된 시대에 ‘어떻게 다시 연결할 것인가’를 묻는 강력한 현대적 알레고리다. 자연과 인간, 과거와 현재를 잇는 이 상징적인 행위는, 100년의 시간을 관통하며 오늘의 도시민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같은 시대, 버지니아 울프는 ‘댈러웨이 부인’(1925)에서 런던이라는 도시가 어떻게 살아있는 ‘정서적 생태계’로 기능하는지를 보여주었다. 울프에게 런던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인물들의 감정과 기억, 고립과 연결을 매개하는 유기적 공간이다.

월틀리 빌리지가 특별했던 이유는 바로 이 사라진 ‘소통의 유전자’를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 내가 본 사과나무는 내 어깨에도 닿지 않을 만큼 작았다. 키 140㎝ 남짓, 울퉁불퉁한 몸통에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나무 아래 놓인 작은 가판대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성미 급한 사과가 먼저 빨갛게 익어버렸네요. 누구든지 이 사과를 가져가도 괜찮아요. 우리가 준비한 작은 과수원이에요.”

곁에는 손글씨로 적은 애플파이 레시피까지 놓여 있었다. 사과 한 알을 두고 ‘과수원’이라 부르는 이 다정한 ‘과장’ 앞에서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가판대 위의 사과는 작고 못생겼지만, 그 주인이 내어준 것은 단순한 과일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였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 골목을 한 바퀴 더 돌고 와서 사과를 가져가려고 했다. 하지만 30분 뒤 다시 찾았을 때, 사과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누군가 그 온기를 먼저 챙겨간 것이다. 이상하게도 서운함보다는 미소가 번졌다.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가 그 사과를 베어 물며 느꼈을 작은 기쁨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그저, 사과 한 알이 놓였던 빈자리였는데, 온 동네가 풍요로워 보이는 그 느낌은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흔히 도시의 수준을 GDP나 화려한 스카이라인으로 판단한다. 그러나 경제적 지표가 성장할수록 우리 사회에는 ‘헬조선’이라는 자조적인 말이 따라붙었다. 높은 빌딩과 최첨단 보안 시스템으로 무장한 아파트는 늘어났지만, 그 안에서 느끼는 고립감과 불신은 오히려 깊어졌다. 복도에서 마주친 이웃을 인사 대신 경계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도시가 과연 건강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의 결핍이 빚은 문제다. 사회적 자본이란 구성원 사이의 신뢰, 관계망, 그리고 호혜성의 규범을 뜻한다. 월틀리 빌리지의 사과나무 주인은 누군가 사과를 훔쳐갈 것이라는 불안을 선택하지 않았다. 대신 이 사과를 가져간 이웃이 오늘 하루 조금 더 나아지기를 바라는 신뢰와 나눔을 택했다. 담장을 높이는 대신, 마음의 문을 열어둔 것이다.

이러한 신뢰의 밀도가 도시의 품격을 결정한다. 낯선 이를 잠재적 위험이 아니라 잠재적 이웃으로 바라볼 수 있는 여유, 내가 건넨 작은 친절이 언젠가 공동체 전체로 되돌아올 것이라는 믿음. 이것이 결여된 도시는 아무리 예산이 많아도 살기 좋은 도시가 되기 어렵다. 신뢰가 빠진 성장에는 결국 고립과 불안만 남는다.

새해의 도시는 다시 효율과 속도를 향해 달려간다. 스마트 시티라는 이름 아래 모든 것이 관리되고 통제되지만, 사람의 온기는 점점 옅어진다. 월틀리 빌리지의 낡은 포치와 사과 한 알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다. “우리는 서로를 믿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편리함이 신뢰를 대신할 수 있는지, 기술이 관계의 빈자리를 메울 수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이야말로 우리가 만들고 싶은 도시의 얼굴일 것이다.

우리나라의 아파트 숲 사이에서도 사과나무 하나쯤은 자랄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이 꼭 실제 나무일 필요는 없다. 엘리베이터에서 먼저 건네는 짧은 인사, 화단의 꽃을 꺾지 않고 함께 지켜보려는 마음. 이런 작은 ‘포치의 태도’들이 모여 도시에 온기를 남긴다. 누군가 먼저 문을 열 때, 경계로 가득 찼던 공간은 비로소 생활의 장소로 바뀐다. 도시를 바꾸는 일은 거창한 정책에서 시작되는 건 아닐 것이다.

도시의 품격은 건물의 높이나 예산 규모가 아니라,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이 서로를 대하는 방식에서 드러난다. 성미 급해 먼저 익어버린 사과 한 알이라도 먼저 내놓을 수 있을 때, 관계는 다시 시작된다. 올해, 우리의 일상 속에는 어떤 사과 한 알이 놓일 수 있을까.

출처: 디지털타임즈(오피니언/칼럼)
입력 2026-01-14 17:37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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